새 계명
기독교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십계명과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이라고 합니다. 이 세 가지가 기독교의 보물로
일컬어지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중에 십계명이 기독교의 보물로 손꼽히는 이유는 십계명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쳐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은 오직 우리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이며,
우리 인간은 이 질문을 통해 다른 피조물들과 구별됩니다. 이 세상의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주어진 본능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주체적인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기에 저마다
다른 고유한 삶을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하게 됩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번민하며 고뇌하게 됩니다. 인류 역사에서
사람들로부터 현자(賢者)라고 일컬음을 받았던 사람들은 그 물음에 대해
여러 답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말을 들어보기 전에
먼저 십계명을 읽고 그 뜻을 새겨야 합니다. 십계명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기 때문입니다.
전자제품을 사면, 그 제품에 대한 사용 설명서가 들어 있습니다. 그 제품을 제대로 사용하려면 반드시 사용 설명서를
읽고 그 내용을 숙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경험과 감(感)에 따라 그 제품을 사용하게 되면, 그 제품의 기능을 100% 사용하지 못하게 되고 자칫하면 망가트려 얼마 쓰지 못하고 버리게 됩니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에 대해
가장 잘 아시는 분은 누구시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이 물음에 가장 바른 답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분은 누구시겠습니까?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을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정답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실 수 있는 분은 없는
것입니다.
전자제품이 고가일수록 제품의 사용설명서의
내용도 길어집니다.
이것은 우리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모두 몇 권으로 되어 있지요?
66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 66권 전체가 하나님의 지음을 받은 인간으로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인간사용 설명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 후서 3장 16절에서 17절 말씀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밝혀줍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사람 노릇과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하면서 이 세상을 살 수 있는지를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성경을 읽어야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인간사용설명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글자를 배우지 못해 글을 읽을 수
없고 성경 66권은 적지 않은 분량이어서 다 읽어도 그 뜻을 제대도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헤아리시고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10가지 계명인 십계명으로 요약해서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다 같이 십계명을 큰 소리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제일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제이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제삼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제사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제오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제육은, 살인하지 말라
제칠은, 간음하지 말라
제팔은, 도둑질하지 말라
제구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제십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십계명은 구약성경 어디에 기록되어 있지요?
출애굽기 2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20장을 보면,
십계명에 앞서 출애굽기 20장 1절에서
2절 말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20:1-2)
십계명을 영어로 “Ten Commandment”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계명이라고 번역하는 Commandment는 “명령하다”는 뜻의 동사 command에서 나온 것입니다. 명령은 동일한 내용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누구의 명령이냐에 따라서 그 명령이
지니는 무게가 다를 뿐만 아니라 그 명령에 대한 반응도 다르게 나타나게 됩니다. 같은 명령이라도 동네 형님의
명령과 고을 사또의 명령과 한 나라의 왕의 명령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렇다면 십계명은 누가 내린 명령입니까?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명령으로,
그 명령은 반드시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적인 명령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명령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제 하셨지요?
출애굽 전입니까? 출애굽 후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시고 너희가 이 명령을 하나도 어김없이 다 지켜 행하면, 애굽 땅에서 종으로 살고 있는 너희를
구원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대한 전제 조건으로서
십계명을 주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출애굽한 후
시내산에 이르러 그곳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언약의 핵심내용으로서 십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절에서
2절 말씀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놓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출20:1-2)
십계명의 전문(前文)인 이 말씀은 무엇을 일러주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출애굽이라는 구원 사건이 하나님에 의해 먼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전제 조건으로서,
십계명을 잘 지키면 너희를 구원해 주시겠다고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는
‘구약은 율법을
강조하기에 신약과 다르게 율법을 잘 지켜야만 구원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으로, 구약 어디에도 율법을 잘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다. 구약도 신약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됨을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구약의 출애굽 사건인 것입니다.
안데르센 동화 가운데 ‘미운 오리새끼’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오리들 사이에서 다르게 생겼다고 미움만 받던 오리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오리가 아니라 백조였다는
것입니다. 오리에서 백조로 신분이 바뀐 그 새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백조로 살아야 합니다. 더 이상 오리로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출애굽 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분은 무엇이었습니까?
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음으로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신분이 완전히 달라지 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달라진 그 신분에 걸맞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야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신 후에 주신 율법을 통해서 이것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율법은 구원법(救援法)이 아니라 성민법(聖民法)입니다. 선(先) 은혜, 후(後) 율법인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히브리어로
<토라>라고 합니다. 토라라는 말속에는
“길 안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토라(율법)는 우리가 인생길을 살아갈 때,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를, 다시 말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일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 5경에 기록되어 있는 토라의 수를 모두 세어보면, 총 613가지로 ‘--- 하라’는 248개의 긍정 율법과 ‘--- 하지 말라’는 365개의 부정 율법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613 가지나 되는 율법을 다 기억하고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613개의 율법의 핵심을
10가지로 요약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직접 돌에 새겨주신 십계명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출31:18)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핵심을 열 가지로 요약한 십계명을 다시 두 가지로 함축해 주셨습니다. 그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를 가리켜 사랑의 이중계명(二重誡命)이라고
합니다.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예수님께서 율법의 근본정신으로 함축해 주신
사랑의 이중계명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라고 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사랑하라고 하셨지요?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돕는 배필로 짝 지워주신 배우자나
내가 낳은 자식이라면 모를까, 우리가 어떻게 내 가족이 아닌 내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이기에 내가
아닌 타인을 이렇게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까?
헤아리기 어려운 그 이유를 우리는
21세기의 흑사병으로 전 세계를 두려움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통해 온 몸으로 생생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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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1일 토요일자 우리나라 신문 인터넷 판에 보도된 코로나 바이러스 관련 헤드라인(머리글)입니다.
지난 2월 17일 대구에서 31번 확진자가 발생 하고 그 사람이
신천지 교인으로 대구 신천지 교회 예배에 참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전까지, 우리나라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비교적 잘 통제하고 있는 듯싶었습니다.
그러나 17일 이후 대구에서 감염자들이 급증하고 대구 신천지 교회가 슈퍼 진원지가 되면서 사태는 순식간에 역전되었습니다. 한국이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가 많은 나라로 부상(浮上)하자 한국인들을 대하는 베트남인들의 시선과 태도도 하루아침에 확 달라졌습니다.
중화지역 어느 아파트 입구에는 중국인과 한국인은
‘화물칸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라’는 공지문이
붙고 택시 기사들은 한국 사람인가를 묻고 한국 사람들에 대해서는 승차거부하고 한국인 회사와 상점과 식당에 근무하는 베트남 직원들 가운데 감염에
대한 불안감을 나타내며 자택 근무를 요청하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우리 교우 중에 한 분은 직원들이 찾아와
“네가 한인교회에
다니는 것을 알고 있다. 주일에 교회에 가면 당신과 함께 일할 수 없다. 우리가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위협하고 교회에 가는지를 확인하고 위해 직원들이 주일 아침 집으로 찾아왔다고 합니다.
VINA TIMES에 올라온 기사 하나를
읽어보겠습니다.
“(---) 그녀의 상황은 꽝닌(Quang
Ninh) 있는 딸을 보러가기 위해 하노이에서 버스를 타면서 시작된다. (---) 버스 차장이 한 손님에게 다가갔을 때
(---) 버스 차장은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무시하고 “어느 나라? 중국?”이라고 큰 소리로 물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후 그 손님은 “아니요.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을 때 갑자기 상황이 벌어졌다고 적었다.
한국인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은 운전자는
차를 멈추고 차에서 내리도록 조치했다고 그 때의 상황을 기억하고 있다. 한편, 버스에서 강제로 하차를 당하던 한국인은 “내가 30년 동안 베트남에 살고 있지만,
자금까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소리쳤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 한국인은 결국 버스나 택시조차
잡을 수 없는 탕롱(Thang Long) 다리 입구에서 쫓겨났다고 그녀는 언급했다.”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팀이 동남아시아
축구대회에서 우승하자 베트남 금성기와 함께 태극기가 베트남 사람들의 손에 들려 휘달려졌는데, 남쪽의 어느
도시에서는 태극기가 불태워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한국이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가 많은 나라로 떠오르면서 베트남에 살고 있는 한국인 모두는 거의 한달 가까이 베트남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아야했습니다.
베트남에서는 16번 확진자 이후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가 나오고 있지 있는데,
만약에 한국인 거주자나 방문자들 가운데서 17번 확진자가 나오면, 한국 사람들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게 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베트남의 한국 사람들 모두의 심정은
‘나만 조심하면
된다’가 아니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베트남에서 한국 사람들은
한사람도, 그 사람이 설령 때려죽이고 싶은 원수지간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리면 안 된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종교를 불문하고 이를 위해 날마다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 때 만큼 베트남에서
한국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고 서로를 챙기고 서로를 염려해주었던 때가 언제 있었던가요?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는지를 비로소 생생하게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 이웃도 내 가족과 진배없는 나와 공동운명체임을
깨닫고 이를 고백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우리는 내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일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통해서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일뿐’이 결코 아니며 ‘너와 나는 함께 힘을 합쳐 위기를 돌파해야 하며 같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하는 그렇지 않으면 같이 공멸할 수밖에 없는 공동운명체인 우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요한복음 13장 34절 말씀을 보면, 구약의 십계명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함축해 주신 예수님은 이것을 다시 한 가지 계명으로
압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계명을 가리켜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그 새 계명은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십계명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함축해
주시며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사랑의 이중계명을 “서로 사랑하라”는 한 가지 계명으로 다시 압축해 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일깨워주는 것입니까?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구약의 율법 속에 흐르는
정신을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그것은 이웃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하나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사랑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혀로만 하는 사랑으로, 그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며 그 믿음은 단지 죽은 믿음(약2:17;26)’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왜 이 계명을 가리켜 새 계명이라고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십계명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압축해 주셨을 때, 예수님은 지금까지 아무도 몰랐던 사실을 그들에게 일깨워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서 가운데 하나인 레위기를 보면, 율법의 정신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있음을 밝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9:18)
레위기 19장 18절 이 말씀 속에 율법의 근본정신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임이 계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마22:36)라는 한 율법학자의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그가 익히 잘 알고
있었던 레위기의 이 말씀을 통해 그 물음에 답을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근본정신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한 가지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다시 압축해 주시면서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하신 것입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레위기에 계시되어 있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라는 말씀과 무엇이 다르기에 예수님께서는 새 계명이라고
하신 것인가요? 예수님께서 요약해 주셨던 사랑의 이중 계명과 새 계명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레위기 19장 18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19:18)
“네 이웃”이라고 했을 때, 사람들에게 내 이웃의 범위는 어디까지입니까?
당시 사회에서 이웃은 내가 사는 동네와 지역
사람들이었습니다. 크게 확장한다면 동포까지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피가 섞인 사마리아인들은 동포가 아니라고 간주했기에 그들을 배척하고 그들과 일체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내 이웃이 아니기에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할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세리들도 내 이웃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제국에 빌붙어 동포들의 피를 빠는 기생충과 같은 자들이었기 내 이웃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고무줄처럼 늘였다 줄었다 할 수 있는 것이 내 이웃의 범위였으며 크게 확장한다 해도 동포까지 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과는 다른 것입니까?
아닙니다.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기원후 1세기나 21세기나 사람들에게 내 이웃의 범위만큼 변하기 쉽고 편차가 큰 것이 없습니다.
그 결과, 내 이웃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제와 혐오와 차별과 배척과 폭력과 살상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야기된 사태를 통해서 이 사실을 통렬하게
체험했으며 세계 곳곳에서 이러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노이에서 시외버스를 탔다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쫓겨난 그 사람은 버스 안에 타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내가 30년 동안 베트남에 살고 있지만, 자금까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베트남 사람들을 내 이웃으로 여기며
30년 동안 베트남에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로 위기가 닥쳐오자
베트남 사람들의 시선과 태도가 돌변하면서 하루아침에 그 사람은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베트남 사람들의 이웃 속에서 배제되었던 것입니다.
이태리에서는 코로나 바이러스 사망자가 중국을
넘어서자 중국인만이 아니라 아시아인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테러 위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유럽
국가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도 아시아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적 행동들이 튀어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
이웃의 한계를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에 율법의 근본정신을 “서로 사랑하라”는 한 가지 계명으로 다시 압축해 주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에게 “네 이웃”의 범위는 어디까지였습니까?
유대인 동포로 한정되었습니까?
세리들과 사마리아인들과 이방인들은 예수님의
이웃의 범위에서 제외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종과 민족과 신분과 계급과 성별을
초월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6-28)
여기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는 당시 사회에서 뿌리 깊이 박혀 이었던 인종적, 민족적 차별을 말합니다. “종이나 자유인이나”는 신분적, 계급적 차별을 말합니다. “남자나 여자나”는 성적 차별을 말합니다. 이 모든 차별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모든 차별의 장벽이 그리스도 안에서
무너지면서 이 땅 위에서 실현된 하나님 나라의 열매이며 교회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이 “새 계명”을 땅 끝까지 전파하며 이것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계보건기구(WTO)는 지난 3월 11일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19로 인한 판데믹(Pandemic 감염병 세계적 유행)을 선언했습니다. 세계 각국은 잇달아 봉쇄와 폐쇄 조치를 취하고 세계 증시는 한순간에 폭락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사태가 더 악화되면 인종차별과 타국인들에 대한 배제와 혐오와 테러가 세계 도처에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미움과 증오와 차별과 폭력으로는 그
어떤 문제도 결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내가 정한 “내 이웃”을 넘어 주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것처럼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명령하신 새 계명이며, 그것이 율법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의 근본정신이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한 “내 이웃”을 넘어 주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것처럼 “서로 사랑”할 때만이 전 세계를 공포와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신종 코로 바이러스 19로 인한 초유의 사태를 이겨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는 앞으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19로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지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 세상은
내가 정한 “내 이웃”을 넘어 주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함께 살아갈 수 없고 같이 공멸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몰고 온 환난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미약한 존재임은 철저히 깨닫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하는 하나님의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망각하고 마치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인 양 살아온 우리의 죄를 회개하오니 우리를 용서하여주옵소서
주님께서는 성경 전체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는데 있음을 가르쳐주셨지만, 우리는 내 이웃의 기준을 나의 상황과 이해관계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였다 했으며 동포라는 인종적 민족적 장벽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위기가 닥쳐오자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죄성(罪性)이 튀어나오면서
배제와 혐오와 차별과 테러와 살상이 독버섯처럼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주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제 내가 정한 내 이웃의 범위를 넘어 주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함께 살아갈 수 없고
같이 공멸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주여, 이 환난을 극복하고 새 일을 꿈꾸며 다시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길은 서로 사랑하는 길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주여, 주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